당신의 청춘은 언제입니까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누가 봐도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어린 시절 다양한 꿈을 꿀 수 있었고 무수한 선택지가 놓여져 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랐고 시도했으며 실패했다. 잠시 낙담하다가 다른 선택지를 다시 골랐다. 다시 실패했고 몇 번의 낙담을 경험한 후 마지막으로 고른 선택지에서 편안함과 만족감을 얻었다.
다른 사람이 있다. 가난하고 다소 제한된 가정에서 자란 사람. 어린 시절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서 삶의 방향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많지 않다. 혹은 어떤 방향이 있다는 것 자체도 알 수가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선택했고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그 선택의 대가로 다른 선택지들은 사라졌으며 남아있는 선택지에서 가장 적합한 어떤 방향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흔히 젊은 나이를 청춘이라고 하지만 그 단어를 단순히 나이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을 향해서 종종 '청춘이네'라는 표현을 쓴다. 무의식적일지는 몰라도 거기에 내가 생각하는 청춘의 답이 있다.
"부족한 어떤 것 (혹은 적은 어떤 것)을 사용해서 목적한 바를 향해 달려가는 것"
우리가 청춘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은 늘 부족하거나 적은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지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고여있지 않고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그 모습에서 청춘을 느낀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더 쉬운 청춘 상태를 느낄수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항상 한정된 역량이겠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그 역량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좀 더 잘 가늠하게 되니까.
쳇 베이커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면 늘 빠지지 않은 단어가 '청춘'이다. 그의 음악에는 복잡한 음계나 이론이 없다. 어딘가 익숙한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단조로움에 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적은 수의 음으로 표현하는 어떤 이야기에 우리는 매료된다.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이 있지만 그 뮤지션들에게서 젊은 시절 이후로 청춘을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늘어난 수많은 테크닉과 기교 등이 청춘이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뮤지션과 음악 자체를 같은 선상에 두고 바라볼 것인가 혹은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것인가는 어떤 딜레마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한국에서만도 뮤지션 자체의 인성이나 생활의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듣지 안게 된 어떤 음악들이 있다. (M으로 시작하는 어떤 그룹이나 계절이 들어간 어떤 그룹이나 등등) 알기 전에는 그저 감미롭던 음악이 뮤지션의 어떤 부분을 알게 된 이후로 찝찝함이 묻어나버리는 그런 것들.
쳇베이커 역시 그런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뮤지션이다. 그의 인생은 늘 마약과 함께 했으며 이성에 대한 문란함이나 폭력 등으로 얼룩져있다. 어떤 이는 그런 부분별함을 청춘이라는 단어로 묶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청춘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개인마다 어떤 기준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그 뮤지션이 죽었으며 그 뮤지션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이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 그 뮤지션과 음악 자체를 구분해서 본다. 반대로 그 뮤지션이 살아있거나 그 뮤지션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할 경우 그 음악을 향유하지 않는다. 나의 그 향유가 그 뮤지션의 그런 생활을 지지하거나 타인의 아픔에 더함을 주는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런 자기편의적인 해석이 불편할수도 있다. 그 생각도 존중한다. 다만 엄격한 기준으로 음악과 문학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이나 문학을 최소 절반이상을 날려보내야 한다.(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스콧 피츠제럴드, 다자이 오사무 정도일까) 그만큼 예술과 향락적인 삶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듯하다. 당신의 결론을 찾기를 바란다. |